캐스팅이 내 맘같지 않은 건

2022. 11. 13. 06:03Program

하루 이틀 겪어본 일이 아니다.

 

흔쾌히 수락한 일정을 직전에 취소하는 경우도 있고, 누굴 섭외했더니 옵션으로 다른 사람을 끼워 파는 경우도 있다. 매니저가 끈질기게 연락 와서 오케이 했더니 바로 다른 작품 잡았다며 날아가기도 하고, 시상식 MC로 두 명이 동시에 섭외되어 쌍욕을 들으며 한 명을 캔슬하기도 했다. 나는 저 사람이 필요하한 데 그는 자기 상품성과 경제적 가치가 극대화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그 선택의 순간엔 '의리'나 '인정'보다는 온전히 그 사람 입장에서의 '합리성'이 판단 기준이다. 평소에 아는 사람이면 그나마 좀 나은 편. '안면'이라는 보조 제어장치가 없으면 캐스팅은 결정되는 순간부터 좌불안석이다. 제작진 입장에선 끊임없이 확인할 수밖에 없다.

 

2000년에 DJ DOC를 캐스팅한 적이 있다. 그해 5월에 The Life... DOC Blues 앨범이 나온 후 Run to you 방송까지는 한 달여의 시간이 걸렸다. 당시 경찰, 기자들과 각을 세우고 있던 그들의 앨범은 출시 직후에 지상파 3사 심의에 걸렸고 (심지어는 앨범 전체 방송불가...), 그걸 풀기 위해서 예능국장실에 세 번이나 찾아가고, 부장, 심의부까지 선배들을 무식하게 졸라서 결국 별도의 심의용 앨범(?)을 다시 만들어 제출하는 것으로 타협안을 만들어 방송 출연 허가를 얻어냈다. 대전 특집 생방송으로 기억하는데, DJ DOC 캐스팅이 빛났다. 이후 Run to you는 전국을 들었다 놨고 공중파 3사 중 우리만 심의를 풀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음악캠프에만 출연했다. 약 두 달 정도 독점으로 출연하면서 음악캠프 최고 시청률은 (비가 억수로 내린 날이긴 했지만) 19.9%! 덕분에 내 피디 생활 통틀어 가장 행복한 여름이었다. 그때 하늘이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키운 고재형 선배가 우정의 무대로 옮기니까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정의 무대에 출연한 걸 두고 패러디한 멘트다. "형, 이제 형이 하는 프로는 뭐든지 해요. 우정의 무대도 갈게요!" 그런데, 그런 DOC도 내가 21세기 위원회로 옮기고 나서 여러 번 섭외했는데 단 한 번도 출연한 적이 없다. ㅠㅠ 그 당시 그들 입장에서 '합리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 프로그램에 나와서 그들이 덕을 보긴 했지만 나 역시 '평생 기억할 시청률과 미친 듯이 일하면서 행복했던 꿈같은 기억'을 얻었으니... 

 

 

Acut 녹화 준비 기간 중에 몇 번이나 확정한 엔트리 명단에 변수가 생겼다. 이른 바 심경변화. 10여 명의 후보군을 압축하고, 여러 가지 조합을 만들어 5명을 확정한 건데 1명이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중도 하차를 요청하면 캐릭터, 성비, 장점 및 단점을 고려해 결정한 전체 엔트리 설계를 다시 해야 하고 부득이하게 한두 명을 더 교체하는 불상사(?)도 벌어질 수 있는 상황. 매번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보고 우려하는 부분이 뭘지, 제작진이 어떤 부분을 채워주면 될지 오랜 시간 집요하게 커뮤니케이션 해보지만 보통 결론은 이미 나 있다. '하루만 더 생각해 보겠다'는 말에 희망을 걸고 하루 동안 그가 고민해 결정을 번복하길 기대해 보지만 맘이 뒤집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번 녹화에는 통상적인 심경변화 외에도 '건강'이라는 변수가 컸다. 심사위원 중 한 분 김중만 선생은 녹화 열흘 전쯤 과로로 입원하셔서 팀 전체가 멘붕에 빠지기도 했다. Acut 캐스팅 중 가장 먼저 확정한 출연자이고 프로그램의 기둥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쩔 수 없지. 병원에 입원하신 분을 우겨서 모시고 올 수도 없으니...

 

"선생님 한번 더 와야겠습니다. 다음번엔 꼭 늦지 않겠습니다."

"하하, 괜찮아요"

내비가 30분 걸린다길래 2시에 여의도를 출발했지만 성수동에 도착하니 3시 반이다. 지난번 섭외 때도 길을 잃어 헤매다 늦었는데 이번에도 나가는 길을 놓쳐 동부간선에 올라타 저 멀리 빙 돌고 나니 지각이다. 터프한 이미지의 김중만 선생이지만 실제로 만나면 너무나 다정하다. 본인 말씀으로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엄격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중할 수밖에 없다고... 분명 섭외 전에 TV로 뵌 촬영장에서의 모습은 '눈에서 불을 뿜는 사자'였는데, 실제로 만난 느낌은 친근한 큰 형님이다. 

 

"섭외를 부탁드리려고요"

월드스타로 커버린 BTS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아이돌이나 연예인들은 기획사 사장들을 대충 아니까 직접 전화하거나 한 다리 건너면 거의 연결되는데, 사진작가나 패션 매거진 편집장들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난감하다. 젊은 사진작가들은 인스타 DM으로 컨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진이나 패션업계의 헤드급들은 엔터업계 여기저기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고 매거진 홈피에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해도 대꾸가 없고 (물론 일반인도 그렇지만 개인정보가) 뭔가 베일에 싸인 듯하다. 수소문하다가 '김중만 선생께 부탁'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다짜고짜 한번 뵙기를 청했다. 출연을 승락한 첫 미팅 이후 두번째 미팅에서 캐스팅 부탁이라니...

 

"아, 그 친구. 내가 한번 연락해볼게요"

매니저를 통해 통화하자는 문자를 보내고, 김 선생님과 프로그램 녹화 날짜, 참여하는 사진작가와 심사위원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사막, 아프리카, 박영석 대장과의 인연, 이승엽에게 감동하셨던 순간, 작년 연말에 인왕산에 올랐다가 폐렴에 걸린 이야기까지 짧은 동안에 사진과 씨줄 날줄로 엮인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들었다. 재미있는 건 물론이고 인문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젊은 사진작가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는 당부가 있었고, 우리도 녹화를 얼마나 누구와 할 건지, 앉는 대신 서서 하시면 어떨지, 최대한 심사위원의 선입견을 배제하고 진행할 건데 괜찮으실지 등등을 질문하고 선생님의 생각을 들었다. 

 

한 시간 이상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원하는 섭외가 생각만큼 마무리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김선생님 전화하면 한 명은 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사무실을 나오면서도 잘 부탁드린다고, 전화 오면 잘 말씀해 주시라고...

 

그런데, 예감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캐스팅 과정은 원래 이렇다. 될 듯 하다가도 안되고, 때로는 기대도 안 했는데 되고, 변수가 계속 생기고, 해결하고, 전화위복, 새옹지마...